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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현경이랑 세상읽기

이제 알게 되었으니

by 인권연대 숨 2024. 8. 26.
이제 알게 되었으니
박현경(화가, 교사)

 

2024621일 금요일

떨리고 긴장되고 두려운 아침이다. 하지만 나 자신을 믿고 가자. 하느님을 믿고 가자. 언제는 안 떨리고 안 긴장되고 안 두려웠나. 그런데 그렇게 걸어온 발자국 나중에 돌아보면 다 결국은 괜찮지 않았나. 하느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2024623일 일요일

어제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며 펑펑 울고, 오후에는 그림 그리면서 펑펑 울었다. 울면서도 계속 그렸다.

 

2024626일 수요일

어제 정책협의회를 마치고 든 솔직한 생각은 다 그만두고 싶다는 거였다. 나는 이런 일에 맞는 인간이 못 되는데 어쩌다 이런 일을 하고 있는가.

내 자신이 이 교육 시스템에도 전교조 투쟁에도 맞지 않는 인간이란 생각이 든다.

 

2024628일 금요일

결국 아무도 내 편을 들어 주지 않을 것 같다. 결국 나만 비난받을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다.

 

202471일 월요일

푹 자며 주말을 보내는 동안, 출근해 하나씩 차근차근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거 같다는 마음이 생겼다.

 

2024711일 목요일

죽을 것 같았던, 그리고 죽고 싶었던 나날을 지나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린 요즘.

 

내 자신이 왜 그리도 힘들고 아팠는지 확실히는 알지 못한다. 다만 짐작하기로는, 전교조 지회장으로서 모든 일을 너무 잘하려 했고, 혼자서 다 해내려 했고,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능력을 평가받는 기분이 들었고, (사실 아무도 내가 잘하나 못하나 평가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내가 내 스스로를 평가하며 괴롭혔던 것 같다.) 그런 스트레스가 우울과 불안을 단단히 도지게 하지 않았나 생각할 따름이다.

 

4월 말부터 힘겹고 소진된 느낌이 점점 심해지더니 5월 중순부터 7월 초까지는 우울과 불안이 극에 달했다. 특히 625일 정책협의회가 끝난 뒤에는 교육지원청 측에 대한 분노와 무력감으로 울화병까지 더해졌다. 아무도 내 편을 들어 주지 않을 거고 나 혼자 비난을 감당해야 할 거라고 일기에 쓴 628일 금요일에는, 다시는 학교에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책상을 정리한 뒤 조퇴했다. 머릿속엔 다 망친 거 같다, 더는 도저히 못하겠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휘몰아쳤고,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힘들 정도로 몸이 아팠다.

 

그런 상태로 울면서 병원 진료를 받았고,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주말 동안 약을 챙겨 먹으며 푹 잤다. 그렇게 쉬는 23일 동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폭풍우가 가라앉고 맑고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머릿속에 휘몰아치던 극도로 부정적인 생각들이 잠잠해지면서 차차 맑고 침착한 기분이 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차분함이었다. 차분해진 상태에서 생각해 보니 지금 상황이 그다지 망한 상황도 아니었고 교육지원청에 대한 대응 등도 월요일부터 하나씩 해결해 나가면 될 일이었다. 여린 새싹 같은 자신감이 느껴졌고, 심지어는 가느다란 의욕마저 샘솟았다.

 

그렇게 해서 71일 월요일의 일기가 가능했던 것이다. ‘푹 자며 주말을 보내는 동안, 출근해 하나씩 차근차근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거 같다는 마음이 생겼다.’ 이 한 문장에는 죽을 것만 같다가, 아니 죽고 싶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역사가 담겨 있다. 이 값진 경험을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자신감도 의욕도 삶에 대한 사랑도 회복한 건강한 상태. 그러나 자만하지 않을 것이다. 도움을 청할 것이다. 나 자신을 돌볼 것이다. 전부 잘하려는 생각, 혼자서 다 해내려는 생각, 스스로를 평가하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내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 또한 얼마나 강한지 이제 알게 되었으니.

그림 _ 박현경 ,  천사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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