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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97

연말결산 연말결산잔디 올해 늦여름, 문득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쓴 커피가 혀에 닿고 목구멍을 지나 식도를 거쳐 위장에 도착했을 때쯤, 몸에서 기억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 이 맛은 스무 살의 봄에 처음 맛본 자판기 블랙커피 맛과 닮았다. 물론 향은 에스프레소 쪽이 짙고 목 넘김도 훨씬 감미로웠으나 스무 살의 그해 봄, 아직 겨울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그때, 커피 맛을 잘 모르면서도 햇살 들어오는 동아리방에 혼자 앉아서도, 엄마랑 여섯 시간 떨어진 거리에서 처음 살게 되어 느끼는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도, 낯선 또래들과의 자유로운 대화에서도 백 원짜리 커피가 주던 잔잔한 위로는, 아직 커피보다 삶이 더 쓰다는 걸 알지 못했던 그때의 나를 지금 여기로 불러온다. 물론 쓴맛과 함께 어우러진 신맛과 약간.. 2024. 12. 26.
춤                                                                                                  잔디 올해는 어쩔 수 없이 전에 다니던 성당에 두 번 다녀왔다. 두 번의 장례미사. 한 번의 악수, 한 번의 포옹. 한 번의 봉투와 한 장의 손수건. 한 번의 오열, 한 번의 흔한 눈물. 어떤 죽음은 나에게 깊은 슬픔으로 다가와 가슴이 미어져서 미사가 끝난 후 유가족을 버얼건 눈으로 마주하기가 힘들었고, 어떤 죽음은 나에게 지치고 오랜 고통과의 이별로 다가와 자유로움으로 이어져, 그저 담담히 성당 뒤켠에 서서 눈으로 검은 옷을 입은 유가족의 등을 쓰다듬을 수 있었다. 어떤 죽음은 더 이상 그를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다는 사실이 너.. 2024. 11. 25.
그때는 언제일까요? 그때는 언제일까요?                                                                                           잔디 토요일 아침, 여유로운 잠에 빠져 있을 때 꿈속에서 자꾸 119 차 소리가 들린다. 아, 누군가를 구하러 나는 진정 일어나야만 하는가? 꿈결에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덧 몸은 이것은 꿈이 아니라 실제로 마당에서 들리는 소리라는 걸 알고 벌써 창문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 아, 할머니……. 뒷집 할머니에게로 달려가 보니, 할머니는 주방 바닥에 누워 계시고, 구급대원 두 분이 할머니 좌우에서 제세동기를 가동시키며 분주히 할머니를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단 할머니집 마당으로 구급차를 안내하고,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하는 이.. 2024. 10.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