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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수희씨와 책읽기(종료)

<제90호>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_이수희(충북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국장)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19. 12. 11.

 

나도 요즘 넷플릭스를 한다. 시간이 부족한 나는 여유롭게 즐기기 보다는 쪼개고 쪼개서 잠깐씩 보는 방식으로 본다. 무엇을 볼까, 늘 선택하려다 말기도 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다룬 호평일색의 칼럼이 신문에 종종 등장했다. 망설였다. 어린 여성의 강간 이야기라니 차마 볼 용기가 없었다. 나는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공포스러운 걸 일부러 찾아보지 않는다. 힘들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나 용기를 내길 잘했다. 올해 본 참 괜찮은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책 이야기를 써야 하는데 사실 시월 한 달 내내 나를 사로잡은 건 책이 아니었기에 드라마 이야기를 쓴다.

 

# 마리를 위하여

세 살 때부터 위탁가정을 전전하다 자립을 지원하는 기관에서 살게 된 마리, 마리는 어느 날 밤에 복면을 한 강간범에게 강간을 당한다. 남자 형사들은 몇 번이고 마리에게 끔찍한 기억을 다시금 말하게 하고 진술서를 쓰게 한다. 그러다 결국에는 마리의 진술을 허위진술이라고 결론내고 있었던 사건을 없었던 일로 만든다. 마리는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사건을 겪었지만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에 둘러싸인 채 하루하루를 힘겹게 견뎌낸다. 도무지 마리를 지지하는 사람이 없다.

 

마리가 그렇게 힘들게 버티는 사이 몇 년 후 다른 지역에서 또 강간사건이 벌어진다. 수사를 담당한 여성 형사 듀발은 마리의 말을 믿지 않았던 남자 형사들과는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나 수사에 매달리는 노력들이 너무나 달랐다. 또 다른 지역에도 범행 수법이 비슷한 강간 피해자가 있음을 알게 되고 해당 사건을 맡은 여성 형사 라스무센과 한 팀이 되어 마침내 강간범을 잡는다. 연쇄 강간범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 피해자들을 찍어놓은 사진들이 발견되고 마리의 강간 피해도 허위가 아니라 사실임이 세상에 드러난다.

 

마리가 멀리서 강간범을 잡은 듀발 형사에게 전화를 건다. 지금까지 해준 일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살면서 자신이 만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래도 세상엔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걸 믿으려고 애써왔노라고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고. 그러다가 그 사건을 겪으면서 세상에 희망이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고 눈 뜨면 절망감이 찾아왔으며 세상이 이렇게 나쁜 곳이라면 남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고. 그러다가 자신을 위해 움직이고 잘못된 걸 바로잡는 형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반가웠다고, 강간범을 감옥에 가둔 것보다 더 반가웠노라고, 이제 다시 좋은 일을 상상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마리가 강간 상황을 떠올릴 때마다 등장한 반복된 장면들은 고통을 함께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나 역시 두 여형사의 태도와 활약에 안도하고 위로받았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실화다. 두 기자가 쓴 르포기사가 퓰리처상을 받았고 <믿을 수 없는 강간이야기>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 동백이를 위하여

 

마리를 떠올리다 넷플릭스에서 본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이도 자꾸만 생각났다. 동백은 8살 아들을 키우는 미혼모다. 대한민국에서 미혼모로 산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닐 터. 그런 동백은 씨족사회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를 가진 동네 옹산에서 술을 판다.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미움(?)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하루하루 버텨낸다. 동백은 7살에 고아원에 버려졌고, 그 후로도 늘 미안해하며 주눅 들어 살았다.

 

동백은 그런 말도 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해도 고맙다는 말은 안한다고, 오죽하면 고맙다는 말이 듣고 싶어 기차역 분실물센터 직원이 되는 게 꿈이라고 할까. 그런 동백에게도 햇살이 비춘다. 쭈그러들지 말라고, 행복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용식이가 나타난다. “까불지 말라는 연쇄 살인범의 경고가 동백이를 따라다니지만 별일 없을 거라는 걸 알 수 있다. 동백이가 더 이상 주눅 들지 않고 저 스스로 빛을 낸다는 걸 알게 됐으니 말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동백이와 마리가 살아간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해도 힘겹기만 한 그들에게도 조금은 홀가분하고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지금 보다 더 어깨를 펼 수 있는 날들이면 좋겠다. 그래서 세상은 또 살만한 게 아니냐고, 하루하루 희망이 있다고 믿으며 애쓰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위로가 된다고 말하면 너무 작위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구마구 응원하고 싶어진다. 우리 모두의 삶을 말이다. 누구도 외롭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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