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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살며 사랑하며

<4호> 마음의 습관을 살피는 신앙!, “숨”이라는 공간_경동현 회원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20. 8. 7.

 

몸 담고 있는 우리신학연구소에서 다큐로 만나는 종교의 속살이라는 주제로 여름 강좌를 진행 중이다. 다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요즘 여름이 가기 전에 괜찮은 종교 다큐 한 편 권해 드리고 싶다. 6개의 서로 다른 종교 중에서 무속을 다루는 여섯 번째 강좌에서 보게 될 <푸른 눈에 내린 신령>이라는 다큐다.

 

이 다큐는 서양인 최초로 한국에서 신 내림을 받은 독일 여인 안드레아 칼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안드레아는 200612월 인간문화재 김금화 만신으로부터 신내림을 받기 위해 한국 땅을 밟았다. 평범한 주부에 불과했지만 걸어온 인생만큼은 평범치 않았던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예지력으로 마녀소리를 듣고 자랐다고 한다.

 

가톨릭 전통이 오래된 독일에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해답을 얻지 못해 늘 고민하던 안드레아의 삶이 변화를 맞게 된 것은 20066,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세계 샤먼 대회에서 김금화 만신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였다. 김금화 선생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과 닮았음을 느낀 그녀는 내림굿을 결정했고, 운명적으로 신의 부름 앞에 섰다.

 

아주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딸의 변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머니와 달리 상담을 위해 찾아간 본당 주임신부가 안드레아에게 전한 애정 어린 위로의 메시지였다. 안드레아가 찾아가 자신이 무당이 됐다고 이야기하자 정작 본당 신부는 자기들의 한계를 인정하며 그동안 교회 공동체가 안드레아를 배려하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해했고 신을 찾아가는 길에 우리는 동료라는 말로 안드레아를 받아들였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가정 안에서 상처받았던 안드레아는 본당 신부의 말에 일종의 해방 체험을 하는 듯 보였다. 배타적인 교리, 제도라는 틀에 얽매인 경우를 자주 접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매우 감동적이고, 이런 게 진정한 복음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현대 영성가 로날드 롤하이저는 오늘날 서구사회는 교회에 나가는 사람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영성에 관심을 갖는 사람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면서 현대 사람들은 신앙은 원하지만 교회는 원하지 않으며, 의문을 갖기를 원하나 해답은 원하지 않으며, 진리는 원하지만 순종은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사람들을 새로운 가치로의 복원을 꿈꾸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는데 안드레아 칼프도 이러한 여정에 발걸음을 내디딘 그리스도인이리라.

 

하지만 슬프게도 그 반대쪽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교회에 나가는 신자 중에 많은 이들은 교회는 원하나 신앙은 원하지 않고, 해답은 원하나 의문은 원하지 않고, 전례는 원하나 경건함은 원하지 않고, 순종은 원하나 진리는 원치 않고 있다. 이런 상황 탓인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신앙이란 말의 의미는 특정 교파에 속해있다는 의미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신앙은 믿음과 행동과 마음가짐이라는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최근 많은 신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누군가의 신앙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 자세로 살고 있는지’, 이 셋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 말은 신앙이라는 말을 특정 종교가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말로 바꿔 생각해볼 수 있다. 예수, 석가, 마호멧 등 누군가에 대한 혹은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은 세상과 타자에 대한 행동, 마음가짐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마음에 대해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정치 혹은 공적인 것과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마음공부영성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현실을 심각하게 고민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 본다면 내면과 외면을 분리시키고, 영성과 정치를 분리시키는 생각 자체가 오늘 우리가 겪는 위기의 중요한 원인이지 않을까? 사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신비적인 것과 예언적인 것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었다. 참된 관상주의는 역사와 사회 속에 있는 폭력과 고통의 실재에 대해 눈감지 않았다는 사실을 현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이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영성과 정치를 가르고, 출신지역을 가르고, 심지어는 갖고 있는 단편적인 정보에 따라 우리너희를 가르는 대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안드레아 칼프가 독일 사회에서 받은 상처는 우리들의 이러한 마음의 습관과 무관치 않다.

 

젊을 때 마르크스를 읽고 피가 끓어올라, 사회를 철저하게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믿었던 젊은이는 그 뜻이 좌절되는 경험을 통해, ‘사회를 철저하게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려고애쓰는 인간이 하는 일이 별로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학습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에도 가랑비에 옷 젖듯 우리너희를 가르는 습관이 자리하게 된다. 이제까지의 역사가 보여준 바에 따르면 철저하게 인간적으로 사회를 바꾸자고 외친 운동들은 거의 예외 없이 누군가를 배제시키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이념을 실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우리너희를 흑백의 구도로 나누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너그러움의 여백에서 이 사회는 제대로 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는 마음이 아무리 갈라져 있다 해도 상대의 인간성마저 부정하지 않아야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이견을 가진 이들이 정직하고 열린 마음으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마음 맞는 이들이 끼리끼리 점유하는 장소가 아닌 서로 마음이 달라도 와서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이유다. 신입 회원으로 한 마디 한다면 인권연대 이 그런 공간이 되어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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