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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111호> 아버지와 잔디_잔디(允)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21. 7. 22.

 

느린 걸음으로 다가서고

멈추어 서서 바라보며

난 작은 꽃으로 살고 싶어

- 잔디

 

말하고 싶은 나와 하고픈 말을 삼키며 무거운 몸으로 온갖 말을 하면서도 목구멍까지 차오른,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서성이는 내가, 둘 다 내 안에 있다. 이 둘의 불일치는 나를 둘러싼 가족 공동체를 힘들게 했다고 나는 고백할 수 있다.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도 함께 힘들었음은 물론이다. 내 아버지와 행동 속도와 생각의 흐름이 매우 달라, ‘느려터진’, ‘물러터진의 수식어를 아버지의 험한 입을 통해 내내 듣고 살던 나는, ‘공부라는 도피처이자 놀이터에서 열심히 놀아 스무 살에 그의 슬하에서 겨우, 기어 나왔다. 그 이후 진정한 말하기와 사람에 관심을 두고(내 존재의 뿌리인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어서) 열심히, 노력, 하며 걸,,,,고 생각했다.

 

그 노력이라는 것은 이러했다. 나의 포(아기집)에 머물다 출생을 통해 나의 몸과 분리된 아이들이 아플 때, 아파? 라고 물었으며, 힘들 때는 꼬옥 안아주며 공감하려 했고, 되도록이면 내가 겪었던 아픔과 힘듦, 불편함은 겪지 않기를 바랐고, 그것을 막아주려 애썼으며, 혹은 그들이 힘든 것이 빤히 보이는 상황에서도 그들을 공감하기보다, 그 상황 자체를 평화로운 것처럼 이끌어가는 것이 그들에게 편안함을 선사하는 것으로 여겨, 결과적으로는 그들을 다시 더, 누르는 어리석은 짓도 수없이 반복하여왔다. 돌아보면 그때는 그것이 나의 최선이라 믿었다. 그 과정에서 주체적으로 혹은 진실하게 살아가고 싶은 나와 언어로 말하지 못하는 나는 계속 불일치하였으며, 사랑받고 싶으면서도 그것을 외면하고 그저 견디며, 사랑하는 것이 나의 존재 이유인 것처럼 심각하게 살아왔음을 이제 본다. 내가 태어날 때 그저 받은, 나의 존재 가치인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사랑스럽고, 소중하고, 가치 있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많은 시간 살아왔다. 어떤 것을 애써 노력해서 해야 하고, 깊게 생각해서 행동을 하고, 애를 쓰고, 무엇을 참고, 그것을 꾸준히 해야만 내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정말, 꾸준히 해왔다.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선물하는 것은 기쁘게, 자신에게 이천 팔백원 짜리 아메리카노 한 잔 선사하는 것은 열 번 넘게 고민하면서...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선뜻 사서 한 잔 쿨하게 자신에게 건네도 되는데... 망설이며, 누르며, 그렇게 살았다.

 

나의 아버지. 그는 칠십 오 년 넘게 살아왔고, 그가 믿는 것은 자신의 주먹, 자신이 일구어놓은 집과 연금과 통장 안의 잔액. 이제 그는, 몇 해 전 받은 수술의 후유증과 남은 상처, 통증 그것을 반복하여 발음하는 수없는 단어들... 자전거를 타고 하는 소일거리, 텃밭의 몇 가지 작물, 휴식... 그런 것으로 일상을 채워간다. 그도 나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사랑스럽고,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일 터인데, 그 길과는 너무나 먼 길을 돌아돌아 다시, 그 길로 돌아오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일 년 넘게 아침마다 드시는 마실 거리를 보내 드리고 나니, 이제 감사 인사를 보내오셨으니 말이다. 삶을 완벽한 모습으로 살아내야 한다고,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 그가 나에게 건넸던 수많은 질책들, 가난한 살림에 혼자 혹은 배우자와 삶을 이어가도 힘겨웠던 그가, 큰 딸 아이가 어서 자라 살림살이를 같이 감당했으면 하는 생각에 건넸던, 니가 공무원 생활을 해서 막내 대학 학비도 좀 대고 해서 막내를 같이 키우자 했던, 그의 많은 말에 담긴 그도 어찌할 수 없었던 그의 심정에는, 이젠, 공감할 수 있다. 아픔 없이. 그도 나처럼 아기의 웃음을 보고 웃고, 가시에 찔리면 아파하고, 아름다운 노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말하고,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고, 자신이 애썼던 수많은 시간 들에 고맙다고 인사를 듣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 조금 안다. 그를 이해하고 싶어서 시작한 나의 공부의 시작이 이어야 한다는 것도 이제, 안다. 그래서, 그간의 수많은 순간 속에서 힘들었던 나, 속상했던 나, 억울했던 나, 애썼던 나를 토해내고 있다.

인생이라는 깊은 바다에서 그간 내가 사용했던 영법과는 다른 정말 수많은 영법이 있음을 배우고, 때론 나의 영법을 치유하거나 고치기도 하고, 때론 아무런 영법도 사용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그 자체로도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알아가기도 하며, 삶 속에서 내 잘못이 아니지만, 내가 풀어야 할 숙제가 있음을 아프지 않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리고 너무 진지하지 않게, 천진난만하게 내 안의 어린 아이를 불러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좋다는 것을 배우기도 한다. 무엇보다 재미있게, 무겁지 않게, 자유롭게...

 

나는 나와 더 재미있게 놀이할 것이고, 나 자신의 노래도 자주 부르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할 것이다. 쉬고 싶은 나를 다그치지 않고 쉬고 싶을 때 쉬라고 말해 줄 것이다. 그 무엇보다 내 친구의 어느 날의 깨달음처럼, 내 공을 누군가에게 받아 달라고 받아 달라고 애원하기보다 내 공은 내가 쥐고 있고, 던질까 가지고 있을까는 내가 선택한다는 것을 알고 일상에서 실험하고 있다. 수많은 말들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던 나를 애도하고, 그 과정 속에서 켜켜히 쌓았을 상처들에 새로운 생각과 문장으로 연고를 바르는 시간. 나의 작업이 늘 가벼워지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늘 눈물만 흘리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 갑작스레, 흐르는 눈물에게 뭐라 위로를 건네지 못할 때도 있어서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태어난 후 처음으로 나에게 말 거는 것처럼, 새로운 이 시간이다. 아버지가 나에게 건네시는 고마움의 인사를, 아무런 의심 없이, 그저, 고마움으로 받게 되는 지금이, 한량없이 기쁘고, 좋고,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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