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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호> 선물_정미진(인권연대 숨 일꾼)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19. 10. 23.

 

 

어제 시 한편을 선물 받았다. 너무 기쁜 선물이지만 이내 마음이 불편하고 무거웠다. 그저 외면하고 근사한 모습만 보이려는 마음이 무거운 돌로 꾹 짓눌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맞다. 진정으로 마음을 나눈다는 건 나의 치부를 들켜가는 일이였지..’

오늘은 그 시를 소개해주고 싶다.

 

 

어느 오후

 

오늘 하루를 단 한줄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듯이

당신을 한 줄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문장이 시작되듯이 새벽녘은 첫 그림자를 길게 그었고

당신의 속눈썹처럼 길고 촘촘한 밤이 찾아온다.

 

오늘 당신의 흰 하루에 그어진 한 획, 한 획은

어느 누구의, 어떤 마음의 그림자였는가.

당신의 커다란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투명하고 따뜻한 활자로 옮기고 싶은

1월 어느날 오후

불안도, 두려움도, 설렘도, 기쁨도

자신을 잊고 잦아드는 어느 오후

 

 

나는 어릴 적부터 감정을 가둬두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했다. 겁 없는 성격 탓도 있지만 사실 더 큰 이유는 감정을 가둬두면 그 감정이 쌓이고 자라나, 나의 손발을 묶고 나를 마치 죽은 사람으로 만들거나, 타인으로부터 고립시킬 것 같아 무서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내 감정을, 속내를 훤하게 내보이며 사는 방식으로 생존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이 방식은 나의 오래된 친구이자 끈질긴 습관이다.

 

이 시를 쓰고 선물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들어내는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종종 나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제 나는 이 시 덕분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돌아볼 수 있었다. 내 마음을 모두 드러내고 살아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아마 나의 치부를 들킨 관계가 무겁게 다가와 나에게는 새로운 세상과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

 

오늘 이글에 특별한 목적은 없다. 평소 내가 하듯 그저 내보이고 싶었다. 다만 불안해서가 아니라 감사함 때문이다. 나의 부족한 존재가, 치부가 있는 그대로 타인의 손끝에서 쓰여지는 감사함이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전달된다면 물어보고 싶다.

 

지금 당신의 곁에도 당신의 나약함을 들킨 사람이 있는지.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게 하는 사람이 있는지.

 

올 겨울은 세상을 덮어버릴 만큼 하얀 눈이 오지 않아 아쉽다. 오늘 집에 가는 길에는 하얀 눈이 아닌 또 다른 겨울의 모습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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