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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제88호> 반_잔디(允)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19. 10. 24.

반달.

어느 날에는 여위어가는 것처럼 여겨졌다가, 어느 날에는 커져만 가는 것처럼 여겨지는 모양새. 점점 커져 차오른다고 여겨질 때에는 내 마음도 차올라 충만하다. 야위어간다고 여겨질 때에는, 주방에 옅은 불빛 하나 켜두고, 잠이 든다. 가로등 하나 없어, 희미한 불빛조차 없는 캄캄한 숲속에서, 까만 밤 잠시 일어난 식구 중 누구도 넘어지지 말라고, 캄캄함 속에 길 잃지 말라고... 달디 단 편안한 잠 속에서는, 희미한 충만을 마음속에서 자가발전한다. 다시 반가이 맞게 될 반달을 기다리며.

 

반말.

다섯 살 아이가 지하철에서, 옆에 앉으신 할아버지께 너는 이름이 뭐야?”라고 물었다. 아이엄마는 어르신께 양해를 구했지만, 아이가 자꾸 반말로 어르신께 말을 걸어 불편해서 다음 역에서 내렸다는 민망한 이야기가 있지만, 나에게는 재미난 이야기. 우리집 아이들도 그 시기에는 그러했다. 듣고 있으면, 아이는 해맑은 웃음이지만, 내 얼굴은 점점 빨갛게 되는 상황들... 지난주에 치료대기실에서, 형제자매 프로그램으로, 동생의 놀이치료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 향기 나는 손목시계를 자랑하기에 나도 선물 받고 싶다고 했더니, 몸은 일곱 살이지만, 마음은 다섯 살인 이 너도 우리엄마한테 말해, 아니면 전화로 택배아저씨한테 달라 그래, 라고 하기에 그렇게 할게 하며 웃고 있는데,‘의 어머니와 할머니께서 어려워하셔서 뒤돌아 대기실에서 나왔다. ‘은 나를 진심으로, 챙기려 건넨 말인데... 재활사와 내담자의 관계에서 벗어난 이웃으로서의 자유로운 대화... 낯설지만, 동시에 친근함을 선사하는 반말의 세계. 조심스레 건너야할 강이다.

 

반바지.

일 년에 한 이주 정도 무척 더운 때에, 집에서만 입게 되는 의복. 일도 없이, 외출도 없이 내내 집에 머무르다 아무 것도 해 놓은 일도 없이 화들짝 벌써 네 시네...하게 되는 오후 네 시쯤. 빨래 걷으러 마당에 나갈 때에는 긴 바지로 갈아입게 된다. 만약에 반바지 차림으로 빨랫줄 앞에 섰다가는 팔다리를 한껏 움직이며, 빨래 걷는 춤을 추어야 한다. 모기의 습격에서 나를 보호하려면. 줌바댄스 격의 빨래춤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잽싸고 근성 있는 모기에게 만약 물렸다면, 물린 곳을 매몰차게 두세 번 두드려준다. 가렵지 않을 때까지... 버물리가 가까이 없을 때의 응급처치. 효과만점. 버얼건 아픔에 가려움을 잊게 되는 묘한 방법. 가려움을 유발한 모기에 대한 원망을 잠시 잊게 되는 어리석은 묘안...

 

반절.

어느 때에는, 옆 사람과 찐빵을 반절 뚝 나누어 먹듯, 마음의 반절만 정성을 기울여 그 반절만큼만 아팠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음이 달려가다 어디 반쯤에 멈추어 서서, 그 지점에서 서성이다 되돌아오면 서운함도, 화도, 아쉬움도 반절만 쌓여 상처 난 생각이 깊어지지 않을텐데. 나와 만나는 상대들도 그러하면 좋을텐데. 예기치 않은 순간에 나에게 도착한 서운함에서 가볍게 점프할 수 있기를. 예기치 않은 순간에 상대에게 갔을 당황스러움에서 껑충 점프할 수 있기를... 점프할 생각조차 잊고, 힘들고 두려운 생각에 깊이 빠져 후회와 분노의 동그라미를 빙빙 도는 실수를 하지 않게 되기를... 용서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일에 대해서도 그저, 즉시 용서하기를. 나를, 상대를... 그저 나를 위해서라도... 힘겨워 마음이 터질 것 같은 순간을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선물로는 주지 않기를... 나 하나는 모두이니까... 너 하나는 모두이니까...

 

반올림.

반올림이라는 단어는 있지만, 반내림이라는 단어는 사전에 없더라. 위아래로 끊어버리는 것을 다 반올림이라 한다. 버리거나 올리거나 반올림한 값은 참값은 아니지만, 참값에 가까운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사전에서 이 문장을 읽다가 마셜 -비폭력대화를 체계화한-의 말씀이 생각났다. 우리는 단지 덜 멍청해지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나의 참값이 있다면, 나는 반올림하여도 참값 가까이에 다가갈 수 있을 뿐이라는... 참값을 찾거나 갖는 것이 나의 목표가 아니라, 그저 참값을 향해 걷는 그 길이 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가벼움... 나는 과정을 걷기만 하면 된다는 그 홀가분함... 그리하여 어제보다는 좀 덜 멍청하게 지금을 지내고 있구나를 볼 때, 반올림이라는 단어를 읽을 때의 약간의 으쓱함으로 나를 쓰다듬기를... 어제보다 오늘 훨씬 멍청하여 가슴을 치는 어떤 날에는, 어깨를 으쓱하던 나를 기억하여 다시 마음을 반올림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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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움이 반은 지나갔다. 선풍기 두 대와 얼음. 오후의 물놀이로 견디어낸 시간들. 마당에 서서 온종일, 뜨거운 햇살을 받고 선 앵두나무를 떠올리며, 나는 그만큼 인내롭지 않다는 문장을 써내려간 더운 밤들. 집안의 문을 모두 열고 잠들던 밤이 지나가고, 서늘한 기운에 잠자다 일어나 문을 닫는 시절. 입추를 지나, 말복을 거쳐, 처서에 곧 도착한다. 더위가 풀리고, 장마와 뜨거운 햇살을 견디어내며 기세가 등등하던 들풀의 기운이 누그러지는 때를 맞는다. 이 시국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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