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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4호> 내 생애 첫 연필_잔디(允)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20. 8. 7.

 

참 소중한 나

나는 진실하고 정직합니다.’

마당에 봉숭아꽃이 한창입니다.’

어제는 소나기가 내렸다.’

오늘 아침 텃밭에 들깨모종을 하고 학교에 왔다.’

 

우리 배움터 학습자분들이 요즘 익히고 계신 문장이다. 우리 배움터 학습자분들의 평균 나이는 칠십육세쯤 될 것이다. 그 분들은 나의 학생이시자 스승이신 분들, 나의 어머니이시자 우리들의 어여쁜, 사랑스러운 어머니이신 분들......

우리집 큰 아이가 첫 돌을 맞이할 즈음 시작한 이일을 그 아이가 열 살이 된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 거의 팔 년이란 시간을 어머님들과 배움을 함께 하고 있다. 도시살이에서 농촌살이로 삶의 주 공간을 옮길 때 우리 부부가 가졌던 꿈은 적은 양이더라도 자급자족하기, 부모님의 배려 덕분으로 가졌던 우리의 배움을 문화나 교육의 혜택이라는 이름으로 농촌 아이들이나 어르신들과 나누기였다. 살짝 옆으로 새는 듯하지만, 지금도 생각난다. 대학 새내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도종환 선생님의 말씀. “여러분은 선생님이 되고자 이 배움을 시작하려 합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배워서 남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배워서 남주냐?’를 농담처럼 어른들이 건네던 시절이므로 그 말씀은 내게 다가온 신선한 충격이었다. 각설하고, 전국성인기초교육협의회 분들의 마음과 지혜를 받아 마을 어르신 다섯 분과 함께 교육평등, 행복나눔을 지향하는 어머니학교를 열었고, 마을회관 작은 방에서 옹기종기 모여 공부하다 오년 전에는 글을 배우고자 하시는 학습자 분들이 많아져 농민회 분들과 마음을 합쳐 더 넓은 공간으로 이동하였다. 초기에는 캄보디아, 일본, 중국 결혼이주여성분들과 청각장애인 분, 기초반, 중급반 학습자분들이 한 공간에서 함께하는 다국적통합학습공동체였다가 결혼이주여성분들은 다문화가정지원센터에서 도움을 받으시고, 귀여운 웃음의 소유자 청각장애인 할아버지는 자퇴하시고, 현재는 어머니 학습자 분들만 열 다섯분 정도 함께 하고 계신다. 일철이나 날씨가 안 좋을 때 배움터로 향하는 학습자 분들의 마음은 쉬 닫히지만, 농사거리가 많지 않으시거나 이제 자그마한 밭마저 닳고 닳은 몸으로 농사를 지으실 수 없는 어머님들은 소일거리 하듯, 동무 만나러 선생 얼굴 보러 배움터로 나오신다.

우리는 만나면 따뜻한 커피나 둥글레차를 마시며 유쾌한 수다를 한다. 차는 성마담이 담당하신다. 성여사님은 우리 사물함 열쇠키의 번호를 공책 한 켠에 적어 네 자리 비밀번호를 하나하나 눌러 차주전자를 꺼내서 커피물을 끓이거나 찻잔을 씻는 일까지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하신다. 심지어 다리를 다쳐 절룩거리면서도 배움터에 오시고 차를 준비하셔서 감동을 자아내기도 하셨다. 배움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일상의 사소함을 기록하시는 한여사님. 집에 누가 마실을 왔다갔는지, 집에 있는 이가 일머리를 몰라 일을 이렇게 하자 했는데 저렇게 해서 부에가 났다든지....꼼꼼한 한여사님은 마을 어딘가로 마실가실 때 행여 누가왔다 그냥 갈까 휴대전화 번호가 적힌 메모를 방바닥에 놓고 다니신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누가 오던지 전화를 하시오.” 공부 시간에 누군가 삼천리로 빠지는 농을 할라치면 호통쳐서 공부내용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김여사님. 학습자 분들의 연락처를 공책에 꼼꼼이 적어놓고 결석하는 동무가 있으면 안부 전화를 하신다. 지난 스승의 날에는 공책 한 장을 찢어 선생님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라고 적으시고 쪽지를 곱게 접어 초간단 감사 편지를 선물로 주셔서 감동백배! 네 살 딸 아이가 함께 배움터에 가면 꼬깃꼬깃 천 원 한 장을 건네시는 강여사님, 강여사님의 꿈은 둘째 따님이 선물한 두툼하고 큰 어르신용 성경책을 통독하시는 것인데 글이 머릿 속에 들어오지 않아 성모님, 저 이 성경책 꼭 읽고 죽게해주세요라고 울며 애절한 기도를 드리며 공부하신다고... 교과서를 읽어봅시다라고 말하면 꼭 써유?”라고 반문하셔서 웃음을 주시는 박여사님, 틀린 글씨를 고쳐보세요라고 하면 그냥 두지 뭘 고쳐유, 고무(지우개) 아깝게, 팔 아프게...... ”하셔서 옆에 앉으신 어머니께 혼나시는 허여사님. 허여사님은 갑자기 돌아가신 남편분을 그리워하며 봄동안 우셔서 우리도 봄동안 함께 울었다. 수업시간은 여기에 기록하지 못한 어머님들의 과거, 현재 일들과, 이웃 가정 마을 사람들이 화재가 되는 담백한 대화들이 오가는 리얼액션스팩터클 연속 드라마이다. 수업시간에 가장 많이 웃고, 가장 많이 우는 사람은 바로 나이다. 어머님들의 사오정식 답변에 웃고, 어쩌다 어머님들의 소설책 다섯권은 금방 채워질 고단한 인생사를 듣고 펑펑 울고...... 어머님들은 안 웃으시는데 혼자 숨어서 웃다가 혼나고 눈물나도록 또 웃고, 이야기 듣다 어머님들은 담담하신데 혼자 울다가 수업 안 한다고 혼쭐나고.......

편안하고 물질 많은 시절에 태어나 큰 질곡 없이 살아온 나는 어머님들 앞에서 선생이란 이름이 부끄럽고, 긴 인내의 시간을 조용히 걸어오신 어머님들의 몸과 마음속에 따뜻하게 스며있는 오롯한 에너지를 느끼고 배운다. 일상의 불만을 이야기할라치면 암 말도 말어라고 주시는 한 문장 속에 담긴 눈 침묵, 입 침묵, 마음침묵의 지혜를 날마다 배운다. 선생 생일이니 국수 한 그릇 사먹으라고 (뜨거운 햇살 아래 배추심고 고추 따서 버신 품삯의 일부분을...)주머니에 만 원 하나 쿡 찔러주시는 정 스런 손길, 된장 고추장 걱정하시며 가끔 퍼다주시는 된장에서 느껴지는 구수한 마음, 한 장 한 장 양념 얹어 담그신 깻잎김치를 막내 딸 주고 이제 네 차례라며 주시는 그 손길, 눈길, 마음길을 받으며 긴 시간을 어머님들과 함께 걸어왔다. 눈이 어두워도, 손끝이 닳았어도 글자 하나 하나에 온 마음과 몸을 담아 글을 쓰시는 우리 어머님들의 건강과 행복을 두 손 모아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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