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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제101호> 그대에게 보내는 단어, 여덟 번째. _잔디(允)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20. 9. 28.

 

아직 열지 않은 초록 꽃봉오리를 기다란 줄기 끝에 달고 있는 구절초.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공기 속에서 노란 꽃을 활짝 피우고, 그 어느 때보다 줄기도 왕성히 뻗고, 동글동글한 열매도 제법 맺는 호박. 오솔길을 오가며 드물게 만나는 도토리 한 알, 두 알. 혼자서 단풍 드는, 거실에서 마주 보이는 벚나무의 나뭇잎. 가지가 둥글게 휘어지도록 초록 열매를 달고 있는 모과나무. 뭉게뭉게 보송보송 연일 다른 그림을 그리는 하늘. 뾰족뾰족 봄의 새순처럼 돋아나 자라는 푸릇한 쪽파. 봄에 빨간 모자를 쓰고, 밭 한가운데에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의지하여 앉아 계시던 콩밭 할아버지의 오전 여덟시 삼십 이분의 아침 산책. 반짝이는 초록 이파리 사이의 연두 빛 대추 열매. 바람에 흔들리며 살랑거리는, 빨랫줄에 달린 수건의 부드러움. 요즘 만나는 풍경입니다. 턱을 조금만 들어도, 코를 조금만 올려도 다른 풍경 속에 서있게 되는 아름다운 날들. 뜨거운 햇살도, 하염없이 몸에서 나는 슬픈 눈물처럼 흐르던 빗물도 기억이 된, 지금입니다. 다가왔다가는 저 멀리로, 저 멀리 갔다가는 다시 여기로 돌아오는 것처럼 생각되던 진통, 그 고단한 반복의 끝에 도착하여 아기를 낳고, 그 과정에서의 고통의 깊이도 잊은 채, 출산을 네 번 반복한 어느 여인의 진통에 대한 옅은 기억처럼 오늘의 이 기억도 멀어지고 옅어져가겠지만... 오늘이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되기 전에 그저, ‘지금에 머무르고 싶어요. 지나간 일을 후회하며 과거를 붙잡고 있기보다, 오지 않은 날들에 아직 있지 않은 일을 걱정하며 두려움을 만들고 미래를 재단하며 무거운 어깨로 앉아 있기보다, 가벼이 오늘의 구름을, 오늘의 동터옴을, 지금의 늙어가는 제 몸을 바라보며, 느끼고, 토닥토닥 보듬으며, 그 에너지로 와 함께 흘러가고 싶어요. 그 많은 비가, 탁한 강물을 투명하고 맑게 가꾸어 놓았더라구요. 그들처럼 흘러가고 싶어요. 두 줄기도 아니고, 한 줄기가 되려하지 않고도, 함께 흐르는 강물처럼 말이에요.

 

숨겨진, 숨은, 숨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무시해 온, 숨긴 감정들이 마음과 몸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가 어느 날, 불꽃놀이의 불꽃처럼 활활 피어오르거나 우리를 부술 수도 있다. 감정을 숨기거나 드러내면 안 된다고 배워온 우리이지만, 감정이 어떤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다시, 배우는 우리이면 좋겠다. 그 메시지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메시지와 몸에 귀 기울이는 배움을 시작하거나 이어가는 것이 나에게, 인류에게, 세상에게 절실하다고 여겨지는 이때... 내가 곧 세상이니까...

 

엄마

가끔 나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엄마가 아니었다고 아이들에게 외치곤 한다. 그리고, 그 말의 끄트머리에 내 어머니를 어머니’, ‘엄마라는 단어에 제한두지 않고, 그저 한 사람의 자연인을 살아가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붙어오곤 한다. 그리고 또 가끔은, 지금 내 나이였을 때, 너무나 커 보이던 엄마가, 실은 스스로의 두려움을 끌어안고도 삶을 지탱해주신 것에 감사한다. 살아도 살아도, 두려움은, 삶의 어느 순간에도 또아리를 틀고 있다 갑작스레 나타나곤 한다고 여겨지는데, 두렵고, 연약한 마음을 일으켜 라는 존재를, ‘가족이라는 의미를 지키고 가꾸어 주신 것에,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다. 그 삶이 그에게도 버팀목이거나 위로이기를. 삶의 어떤 지점에서도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그 문장에 기대어서라도...

 

잇다

오타가 났다. ‘있다잇다. 있다 앞에 어떤 단어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읍내 동네 카페 잇다라는 이름처럼, 누구와 이어져있고, 어떤 생각과 바람으로 이어지고 싶은지, 대화의 목적과 의도가 잇다’- 연결 -이라는 것이 내 마음 속에 늘 자리잡고 있었으면 좋겠다. 인생의 드라마가 모노드라마가 아닌 이상, 너와 나의 연결 속에서 너와 내가 존재할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서로의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서로 이어져 있지 않다고 상상하는 순간에도.

 

울타리

새로 시작하는 달그락달그락비폭력 대화반에서, 우리는 함께 공부하는 서로를 안전하게 지키고 공부에 집중하고 싶어서 울타리를 쳤다. 동그랗게 앉아서 공부할 때, 나누는 개인적인 이야기는 우리끼리만 공유한다, 이야기하고자하는 핵심만 간결하게 말한다,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자기표현하고 싶지 않을 때에는 패스를 자유롭게 선택한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요청한다, 상대가 요청하지 않았을 때에는, 조언과 충고를 하지 않는다 ……. 지금 곰곰이 음미해보니, 나의 일상 안에서도, 삶에 대한 나의 의식과 태도를 이어가는데 있어서, 나와 너의 가슴 가까이에서 머무는 데 도움이 될 울타리이지 싶다. 내가 나와 함께 숨 쉬고, 너와 같이 일렁일 때에도 이 울타리가 서로를 지켜주겠지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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