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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마음거울

<105호> 겨울과 마당_박윤준(음성노동인권센터 활동가, 회원)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21. 1. 27.

 

이사 온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가지만, 집 앞 마당에 소복소복 눈이 쌓인 걸보고서야 마당 딸린 주택에 이사 온 것이 실감이 났다. 갓난아이처럼 귀엽고 흠 없이 반짝이는 모습은 경이로워서 한동안 쳐다보게 만들었다. 이사 오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모충동의 겨울. 쓰윽-쓰윽, , . 대문 너머 골목에는 이웃집 할머니의 비질 소리가 들려온다.

 

50년은 더 된 오래된 가옥은 최근까지 몇 번의 공사를 거쳤다고 한다. 자 모양의 마루(거실?) 공간 앞쪽을 자가 되도록 증축했고 집 왼쪽편을 조금 증축해서 보일러실과 현대식 화장실을 두었다.(전에는 어딘가에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겠지?) 그리고 보일러실이 있는 곳에 현관문을 두어 기괴함을 더했다. 본채와 마주보는 자리에는 창고들이 칸칸이 있었는데 문 달린 곳으로 따지면 6개의 칸이 있었다. 집 주인 이야길 들어보니 예전에 학생들이 하숙하던 곳이라고 하던데, 그러기엔 차갑고 으슥했다. 공간과도 궁합이 있을텐데 나의 경우 금세 이 집을 좋아하게 되었다. 깔끔한 첫인상과는 달리 여기저기 곰팡이를 어설프게 가려놓은 부분과 주방 옆으로 난 중간문의 키가 낮아 3번 정도 세게 부딪혔던 아픔이 있지만어딘지 정감이 가고 마음이 편안했다.

 

마당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많은 일들을 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한 없이 받아들여서 하얀 실크 털옷을 뒤집어 입고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었다. 이른 아침부터 낮 동안 바닥에 내리는 햇살은 유독 마당에서 빛나서 텅 빈 마당의 공간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친구들이 대문을 통해 들어오면 마당은 작은 쇼케이스 장이 된다. 마당에서 집의 이곳저곳을 보여주고 옥상에 같이 올라가 또 집의 정수리를 보여주기도 한다. 집이라는 곳에 머물면서도 다양한 시선을 가질 수 있어 퍽 재밌다. 이웃에 사는 친구가 감자(나의 개 친구)를 데리고 오면 마당은 진가를 발휘한다. 감자는 마당에서 마음껏 뛰놀다가 거실 창을 통, 통 친다.

 

마당에서 할 수 있는 재밌는 일들을 상상해 본다. 다음 겨울철에는 서울에 사는 친구들을 불러 마당에서 김장을 할 것이다. 처마 밑에는 곶감을 말릴 거다. 차가운 창고 벽에는 넝쿨식물을 길러 볼 것이다. 한 여름에는 마당에 평상을 놓고 친구들과 수박, 참외, 복숭아 나눠먹다가 밤하늘 구경하다 잠드는 상상을 한다.

 

겨울을 장소에 빗대어 말하자면 마당과 같은 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무들은 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생장을 잠시 멈추고 껍질을 두껍게 하는 계절. 동물들은 활동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깊은 잠에 빠져드는 계절. 겨울이라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지나간 일들 중 버릴 것은 버리고 두텁게 할 것은 마음 가까운 곳에 두어본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하늘이 내리는 것만 받아들여도 충분한 계절. 빼곡하게 관찰하고 숲처럼 상상하기 좋은 고요하고 공허한 날들. 모든 죽어가는 것들과 함께 죽음을 연습하기 좋은 날들. 겨울이라는 시간이 가져다주는 귀한 선물들을 두 뺨이 시리도록 힘껏 만끽하기를. 겨울이 우리에게서 봄바람과 함께 흩어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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