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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마음거울

<108호>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_계희수(충북민주언론시민연합 활동가)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21. 4. 26.

 

초등학교 4학년 무렵, IMF외환위기 여파가 우리집에도 찾아왔다. 일산 신도시의 한 아파트에 살던 우리집은 수원의 아주 작은 동네로 이사를 갔다. 푸세식 화장실이 밖에 있고 부엌 바닥이 아스팔트로 닦인 좁은 집이었다. 이사 날 동생과 함께 쓰던 2층 침대를 트럭에 싣고 왔는데, 이사 간 집의 천장 높이가 너무 낮아서 침대를 세울 수 없었다. 아빠는 이삿짐 나르는 구경을 하던 아이들 중 하나에게 2층 침대를 주었다. 2층 침대를 시작으로, 많은 것들이 내 삶에서 사라졌다. 사업을 하던 아빠는 택시운전을 시작했다. 아빠는 30년 무사고를 자랑하는 배테랑 운전자였다. 지상에서 바퀴를 달고 굴러다니는 것들이라면 모두 조작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운수, 운반 자격증이 많았다. 그런 아빠가 자본없이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은 아마 운수회사 소속의 택시기사가 거의 유일했을 것이다.

 

그 일을 선택한 것은 아빠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로 남았다. 날이 흐렸던 어느 날 아침, 2학년이던 동생을 교실에 들여보내고 우리 반 앞에 도착했을 때, 옆반 선생님께서 다급하게 날 불렀다. 선생님은 아빠가 위독하니 동생을 데리고 당장 병원으로 가라며, 병원 이름이 적힌 쪽지를 건네줬다. 아빠 지갑에 우리 학교 이름이 적힌 무언가가 들어 있던 모양이다.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뛰어가는데, 그 애의 걸음이 너무 느려 나는 숨이 넘어갈 뻔했다. 나는 하필 그날 흰색 바지를 입고 있던 참이었다. 간 밤에 내린 비로 곳곳에 생긴 웅덩이를 피할 겨를이 없어 병원에 도착했을 때쯤 바지는 갈색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새벽에 일을 마친 아빠가 교대를 하러 가던 중 교차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음주운전 뺑소니 차량에 치어 6중 추돌 사고가 났다고 했다. 여러명의 중상자가 있었고 그 중 아빠가 가장 심하게 다쳤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는 우리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아빠가 곧 죽을 거라는 말 같았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는 아빠의 모습은 우리 아빠가 아닌 듯했다. 수술실 앞에서 동생과 나란히 앉아 도무지 제어가 안 되는 서로의 울음을 밤새 받아냈다. 조그만 자매 애들이 병원 의자에 앉아 밤새 숨 넘어가게 우는 모습이 안 쓰러웠는지, 어떤 아주머니가 자판기에서 율무차 두 잔을 뽑아줬다. 아주머니는 아빠가 나으실 거라며 우리 어깨를 쓰다듬었다. 울다울다 마침내 정신을 차렸을 때, 아빠가 목숨을 건져 중환자실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주머니는 어느샌가 사라졌고, 나는 그 사람이 천사인가 했다.

 

아빠가 지은 유일한 죄는 5, 10, 12살 남매를 먹여살리기 위해 운전대를 잡은 것이었다. 형벌은 너무나 가혹했다. 중환자실에 간 아빠는 그야말로 숨만 끊기지 않았을 뿐 며칠에 한 번씩 고비를 넘겨야 했다. 엄마는 사고를 수습하고 아빠 상태를 지켜보느라 우릴 돌볼 겨를이 없었다. 비록 산소호흡기에 의존했으나 다행히 아빠는 얼마 안가 의식을 찾았다. 죽음의 길목에서도 자식 걱정만 하는 아빠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행히 국가는 어린 우리를 굶기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우리에게 식권을 줬다. 동생을 데리고 식당에 가서 종이 식권을 내밀면 아주머니는 별 말 없이 백반을 내주었다. 그게 처음 인지한복지라는 거였다. 나라에서 공짜로 밥을 주다니! 아빠의 병원생활이 길어져도 굶어 죽지는 않겠다고 안심했다. 긴 시간을 견뎌낸 아빠가 일반 병실로 올라왔다. 아빠를 돌려주시면 착하게 살겠다고 세상 모든 신께 빌었으니, 앞으로 정말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착하게 사는 일은 생각보다 위험한 거였다. 아빠가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돌아눕는 것도 힘든 장애인이 되었을 때, 세상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 삶에서 차별과 멸시, 불이익은 숨 쉬듯 일어났다. 항의하지 않고서는 사람답게 살아갈 수 없었다. 어린 나는 저항의 말을 옹알이 하듯 배웠다. 허나 가장 큰 난관은 그런 시선과 불이익이 아니었다. 나와 아빠, 우리 가족을 평생 장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건 불합리한 제도였다. 12살 이후로 단 한 번의 주말도 마음 편히 보낸 적 없다. 국가가 놓아버린 아빠를 케어하는 게 내 삶에 부여된 몫이다. 두 시간만 한 자세로 앉거나 누워있어도 아빠는 살이 썩는다. 현실적으로 하루 24시간에서 자는 시간 8시간을 빼면 16시간인데, 여기다 30일을 곱하면 아빠에게 타인의 손이 필요한 시간은 480시간이다. 그런데 아빠에게 실제 국가가 지원해주는 장애인 활동지원 시간은 고작 240시간이다. 그마저도 일요일에는 시간당 1.5시간이 차감되고 목욕 지원 서비스를 받을 때도 이 시간에서 차감된다. 나머지는 전부 가족의 몫이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날에는 따로 도와주시는 분을 섭외해 사비를 들여 아빠를 케어한다. 그나마도 코로나 이후로는 활동지원사를 구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하시던 분 들이 그만 두셨고, 청주시에서 활동지원 서비스를 위탁받은 단체들에서는 각자의 사정으로 활동지원사를 보내주지 못한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내가 사회생활을 무리 없이 하려면 아빠의 둔부가 썩는 일과 맞바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당 해고를 당해 피켓팅을 하다가도 아빠 저녁식사 시간이 되면 혼자 자리를 떴다. 주말에 비대면으로 활동 관련 스터디를 하면서는 소리와 화면을 꺼두고 아빠 식사를 챙겼다. 한번은 외부에서 회의하다가 아빠와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게 갔는데, 용변을 제때 처리하지 못하는 바람에 침대 시트까지 다 젖어버렸다. 두 시간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시트를 갈고 아빠 몸을 닦았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괴감이 들었다. 일평생 겪은 불편, 부당도 해결하지 못하는데 무슨 놈의 허울 좋은 운동이냐고, 사랑하는 아빠의 존엄을 해치면서까지 니가 얻고 싶은게 뭐냐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답 없는 질문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고 눈물이 차올랐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인색한 국가와 불편한 제도에 짓눌려 겨우겨우 숨만 쉬는 삶. 조난당했지만 아무도 구해주지 않고 죽지 않을 정도의 물만 공급받기를 수십 년. 물이라도 줘서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하던 일 다 때려치고 늙도록 집에서 아빠 케어하면 되는 건가? 장애인의 날에 이 글을 쓰다가 속이 터진 나머지, 세종시에서 열리는 장애인 차별철폐 집회에 계획도 없이 가기로 했다. 그곳에 가면, 우리도 자유롭고 존엄하게 살아갈 자격이 있다고 누군가 말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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