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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준11

<제98호> 책임이라는 정치적인 과제_박윤준(음성노동인권센터 활동가, 회원) 그럴 때가 있다. 내가 잘못한 거라고, 나의 부족함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인정하기 싫을 때가 있다. 내가 비겁해서, 무책임해서, 사려 깊지 못해서 그 사람에게 어떤 손상을 만들었음을 인정하기 싫을 때가 있다. 그냥,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덮어두고 믿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있을 때가 있다. 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단단한 쇠붙이들을 불러 모아 방패를 만들고 웅크리고 앉는다. 불안한 마음은 몸과 마음을 천근만근 무겁게 만든다. 아, 내가 별로인 사람이구나. 가슴 깊이 사랑하는 이와 시간을 보낼수록 깨달아가는 진실은 황홀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마음 속 가장 밑바닥에 있는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납작한 쇠붙이를 꺼내서 당신과 내가 함께 확인하는 시간들이었다. 내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 납작.. 2020. 7. 28.
<제97호> 오일팔에는 잠시 멈추기로 한다._박윤준(음성노동인권센터 활동가, 회원) 민주주의, 독재타도, 계급투쟁, 인민해방 … 이념적인 구호들은 꽤 오랜 시간 한국 사람들을 지배해왔다. 그것들은 머리 위에 머무는 커다란 구름과도 같아서 사람들의 하늘을 규정했고, 날씨를 만들었고, 그에 걸맞는 행동들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같은 하늘을 가진 사람들을 동지라 불렀다. 구름은 바람이 불어옴에 따라 흘러갔고, 구름이 떠나간 뒤 마른하늘 아래 선 사람들 중 몇몇은 구름 없이 화창한 하늘을 괴로워했다. 그들은 숲 속으로, 동굴로, 절 지붕 밑으로 들어가 방 한 칸 짜리 구름이라도 소유하고자 했다. ‘한 낱’구름은 한 인간의 마음속에 비슷한 모양의 구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어떤 인간은 자신의 키가 하늘까지 닿는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마음 속 구름과 머리 위의 구름은 서로 부딪히며 천둥소리를 내었.. 2020. 7. 28.
<제96호> 빈소에 찾은 조문객처럼 안녕하신지요. 슬픔이 많은 계절입니다만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들 덕에 소생할 기운을 얻고 있습니다. 꽃들이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더위 사이에서 자신의 시간들을 남김없이 써버리는 것처럼, 저 역시 제게 주어진 시간들을 허투루 쓰지 않고 남김없이 쓰리라 생각합니다. 제 앞에 놓여진 비단향꽃무는 우울한 저를 위해 사랑하는 이가 선물해준 것인데, 그 꽃을 전해주는 그녀의 얼굴빛이 저에게는 구원이었습니다. 그 꽃은 그녀를 닮아 꽃잎이 풍성하고 향이 멀리 퍼지고 생명력이 강했습니다. 그녀와 다투고 난 후에 화병에 놓인 꽃을 발견했습니다. 어느새 줄기 끝 물관이 막혀서 꽃은 꽤 말라있었습니다. 꽃을 살짝 건드리니 보라색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졌습니다. 꽃잎들은 시들기보다는 그 모양.. 2020. 4.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