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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마음거울86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백무산 이른 아침 난데없이 꽃밭에 꽃이 흐드러진 건 내 탓이다 식전부터 앞뒤 다니며 쿵쿵거렸고 내 불면을 화풀이하느라 툴툴 바람을 울렸고 제 빛깔 다 머금기 전에 고요가 몸에 다 무르익기 전에 파르르 놀라 드러낸 건 꽃이 아니라 공포였다. 씨앗은 자신을 떠나 고요를 통과해야 자신을 불러낼 수 있기에, 누구나 깊은 잠을 자야 하는 이유는 몸을 떠난 고요를 불러들일 수 있기에, 잠은 하루치 노동을 지우고 고요를 불러들일 수 있기에, 해가 뜨면 내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육즙 빠져 쭈그렁바가지가 된 시간이 고요에 무르익어야 내일이 뜨기에, 시간을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오늘을 반복할 뿐 내일의 다른 시간이 뜨지 않기에 - 거대한 일상(창비, 2008) 2023. 10. 25.
오늘의 달력 - 유현아 오늘의 달력 유현아 어제의 꿈을 오늘도 꾸었다 아무도 위로할 수 없는 절망의 바닥을 보았다 바닥 밑에 희망이 우글우글 숨어 있을 거라고 거짓말했다 한장을 넘겨보아도 똑같은 달의 연속이었다 못 하는 게 없는 것보다 어쨌거나 버티는 게 중요했다 바닥 밑에 바닥, 바닥 밑에 바닥이 있을 뿐이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바닥에 미세한 금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았다 바닥의 목소리가 뛰어올라 공중에서 사라질때까지 당신의 박수 소리가 하늘 끝에서 별처럼 빛날 때까지 오늘도 달력을 넘기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당신의 애인에게서 내일의 꿈을 들었다 -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창비, 2023) 2023. 9. 25.
가을폭포 - 정호승 가을폭포 정호승 ​술을 마셨으면 이제 잔을 놓고 가을폭포로 가라 가을폭포는 낙엽이 질 때마다 점점 더 깊은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가 외로운 산새의 주검 곁에 누워 한 점 첫눈이 되기를 기다리나니 술이 취했으면 이제 잔을 놓고 일어나 가을폭포로 가라 우리의 가슴속으로 흐르던 맑은 물소리는 어느덧 끊어지고 삿대질을 하며 서로의 인생을 욕하는 소리만 어지럽게 흘러가 마음이 가난한 물고기 한 마리 폭포의 물줄기를 박차고 튀어나와 푸른 하늘 위에 퍼덕이나니 술이 취했으면 이제 잔을 놓고 가을폭포로 가서 몸을 던져라 곧은 폭포의 물줄기도 가늘게 굽었다 휘어진다 휘어져 굽은 폭포가 더 아름다운 밤 초승달도 가을폭포에 걸리었다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창비, 2021) 2023. 8.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