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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마음거울86

야훼님전 상서 야훼님전 상서 고정희 야훼님 한 사나이가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오랜 추위와 각고를 끝낸 사나이가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아주 멀리 떠날 줄 알았던 그, 이제는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줄 알았던 그 사나이는 누더기 옷을 걸치고 섬광 같은 눈빛을 간직한 채 그의 기원을 묻어둔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가 돌아 왔을 때 영원히 닫긴 줄 알았던 기도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가 돌아 왔을 때 영원히 끝난 줄 알았던 자유의 휘파람 소리가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돌아 왔을 때 우리들 기다림이 불기둥으로 일어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야훼님 그가 돌아온 마을과 지붕은 아직 어둡습니다. 그가 돌아온 교회당과 십자가는 더더욱 고독합니다. 그가 돌아온 들판과 전답은 이 무지막지한 .. 2024. 1. 26.
화염경배 화염경배 이면우 보일러 새벽 가동 중 화염투시구로 연소실을 본다 고맙다 저 불길, 참 오래 날 먹여 살렸다 밥, 돼지고기, 공납금이 다 저기서 나왔다 녹차의 쓸쓸함도 따라나왔다 내 가족의 웃음, 눈물이 저 불길 속에 함께 타올랐다. 불길 속에서, 마술처럼 음식을 끄집어 내는 여자를 경배하듯 나는 불길처럼 일찍 붉은 마음을 들어 바쳤다 불길과 여자는 함께 뜨겁고 서늘하다 나는 나지막히 말을 건넨다 그래, 지금처럼 나와 가족을 지켜다오 때가 되면 육신을 들어 네게 바치겠다. -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창비 2001) 2023. 12. 26.
바람의 가닥 바람의 가닥 박홍규 한꺼번에 몰려오는 바람 뭉치라 해도 색깔이 가닥가닥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어느 도시 좁고 냄새나는 거리를 지나왔는지 무슨 계절의 강물을 하루 중 어느 때의 들판을 만나고 왔는지 숲을 통과했다면 무슨 나무 어느 나뭇잎을 거쳐 왔는지 들여다보면 바람 갈피 갈피마다 제각각 묻어 있는 속사정 있기 마련이지만 분명한 건 어디서 무슨 색에 물들어 불어오든 닿는 바람 한 올 한 올마다 나를 흔들어 대고 별수 없이 그때마다 나는 흔들린다는 사실을 그러니 왜 나는 흔들리는지부터 도대체 몇 가닥이 뭉쳐 게다가 끊이지 않고 들이닥치는지 그 중 어느 서늘함에 나는 더 휘청이는지까지 궁리 끝에 알아낸다 해도 여전히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 나무보다 구름(고두미, 2023) 2023. 11. 27.